너무 보고싶었고 설레였다. 내게 이 정도인 영화가 생애 얼마나 있었을까? 결국 봐버렸다. 개봉 1일차에.

결론부터 얘기하면 너무 잘 만든 영화다. 압도감이 있는 쫄깃한 장면이 많기 때문에 영화관에 가서 보는 걸 추천한다. 의외로 초등학생을 데리고 가도 괜찮을 정도로 폭력, 선정적인 장면이 없는 편이다.
아래 두 영화 못지 않게 잘 만들었을 뿐 아니라, 모두 전두환과 관련된 실화 모티브 영화란 점에서 함께 나란히 세울만 하다.
- '1987' : 1987년 6월 민주항쟁 (전두환 장기집권 반대) 723만명
- '택시운전사' : 1980년 5.18 광주 민주화 운동 (전두환 집권 반대) 1218만명
- '서울의 봄' : 1979년 12.12 군사반란 (전두환 쿠데타) ????
10월 26일 박정희가 피살된 이후부터 12월 12일 군사반란을 우여곡절 끝에 성공하는 모습을 스크린에 담았다. 특히 12월 12일 9시간 동안 벌어진 반란군과 진압군과의 대치 상황을 아주 생생하게 그렸다.
자세한 줄거리는 여기서 생략한다. 대신, 몇 개의 꼭지로 나만의 소감을 정리해 본다.
1. 이재명 타격
이 영화가 유독 기대가 됐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아무래도 김성수 감독이 '아수라' 이후에 무려 7년만에 내놓은 작품이라는 것이다. '아수라'는 당시 김감독이 메가폰을 잡았을 뿐만 아니라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SBS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유력 대권주자였던 이재명을 성남 조폭( 국제마피아파)와 깊게 엮인 인물로 조명했을 당시를 기억하는가? 극장 상영 당시엔 259만명에 그쳤던 영화 '아수라'는 뒤늦게 역주행을 하였고, 한 때 성남시에 총각행사하고 다니던 누군가를 모티브로 한 영화임을 네티즌 수사대들이 아주 낱낱이 밝혀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할 수는 없고, 전달된 이야기를 토대로 감독의 상상과 영화적 요소가 가미되어 작품이 완성되는데, 아수라는 어디까지가 팩트이고 어디서부터가 픽션인지 지금도 궁금할 뿐이다. 감독에게 물어봤자 대답은 뻔하지 않겠냐만...
'서울의 봄'을 관람하면서도 이게 정말 사실인가 싶은 장면들이 많았는데, 나중에 핸드폰을 켜서 검색해보니 대부분이 실제 벌어진 일들을 화면에 담았다는 걸 알고 놀랐다. 12.12 군사반란이 물 흐르듯 쉽게 됐던게 아니었다. 그 짧은 순간 엎어질 고비가 많아도 저렇게나 많았었구나. 이게 모두 실화구나. 왜 그동안 몰랐을까...
하마터면 이재명이 대통령까지 당선될 뻔 했는데, 김감독으로선 압력을 안 느꼈을리 없다. 종적을 좀처럼 나타내지 않다가 뒤늦게 발표된 후속작이라 더 기대될 수 밖에 없었고, 세간에 신작으로 얼굴을 비추는 것만으로도 부담스러운데, 하필 황정민을 내세워 이중성을 지닌 실존 인물을 또 한 번 연기했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결국엔 이재명에게 재차 타격을 주게될 영화가 되리라 전망한다.
2. 하나회 재조명 & 인물의 입체화
박정희의 총애를 받았던 전두환. 그가 만든 육군 사조직이었고 쿠데타를 주도한 세력이었으며 훗날 역사의 심판을 받은 이후에도 전두환 그를 끝까지 두둔했던 세력들... 정도로 하나회를 알고 있었는데, 실로 하나회는 그 이상이었다.
영화에서 전두환은 시종일관 거침없는 인물로 묘사된다. 대중들은 그저 전두환을 무식하고 천박하고 대장질 좋아하는 사람으로 기억할지 모르지만, 영화를 보면서 한편으로 ... 이래서 대통령 해먹은 거구나. 허접한 일처리가 없었다. 배포와 강단, 추진력, 일머리, 조직 장악력, 기민함, 사람 부리는 재주 만큼은 어느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구나... 시종일관 영화 보며 생각했다. 인물을 나름 입체화시키는데 감독이 성공한 것. 전두광(전두환)은 정말 강했다. 예상치 못한 방법이었고 그 덕에 진부할 틈이 더 없었다.
하나회가 결코 하루 아침에 뚝딱 만들어진게 아니었다. 내부적인 갈증과 열망을 한 그릇에 담아보려는 누군가가 있었다. 하나회 회원들끼리도 누가 하나회 소속인지 서로 모를 정도로 관리가 철저했다. 전두환이었다. 악의 무리들 입장에서 그는 정말 감탄할 만큼 비범하고 유능한 인물이다.
더불어, 김영삼이 대단한 업적을 이룬거구나 새삼 실감했다. 노태우의 퇴임 이후에도 아랑곳 않고 건재함을 과시했을 하나회 세력을 취임하자마자 단칼에 숨통 끊은거 아닌가. 이거 저거 계산했으면 시도도 못할 일인데 하마터면 문민정부는 임기 내내 하나회에 시달리다 끝났을지 모른다. 그대로 뒀더라면 IMF 외환위기 책임 들먹이며 설쳐댔을 생각을 하니 끔찍하다.
전두환의 하나회는 비록 척결되었으나, 우리 주변의 하나회는 지금도 널려 있는지 모른다. 정도의 차이일 뿐 어느 조직을 가더라도 라인이 있고 밀실 정치가 있지 않던가. "우리는 하나다" 라며 영화 속에서 반복됐던 구호가 한때 나 또한 사내 어딘가에서 신나게 외치던 구호였음을... 씁쓸한 기억이다.
불법(?) 사조직이 그 조직을 과연 갉아먹기만 하는지, 그 조직의 경쟁력을 높이고 체계와 결속을 다지게 하는지는 주인이 판단할 몫이다. 회사는 주주, 기관은 국민. 라인이 암암리에 잘 유지되고 있고 터치가 더이상 없다면 주인들도 다 알면서 묵인하는 것. 사조직이 불법을 저지르는지, 펌프/윤활유 역할을 하는지, 아님 사조직이라면 여하 불문하고 근절시켜야 하는건지 그 존폐 여부 판단은 윤리 그 자체가 아니요, 주인이 결국 결정짓는다. 위대하게 쌓아올린 이 민주주의 탑 역시 주인된 자가 더 똑똑해지고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해야만 무너지지 않을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3. 쫄깃 & 군더더기 없는 깔끔함
관람하는 내내 쫄깃했다는 것은 제작진의 역량이 그만큼 훌륭했다는 것을 뜻한다. 무리 없이 적절하게 치고 빠지길 반복하며 쫄깃함을 선사한다.
또한, 배경 설명을 장황하게 늘어놓는 장면은 단 한 군데도 없다. 영화 오펜하이머가 대중들에게 호평을 받을 수 없었던 이유도 전개가 너무 산만하고 장황했기 때문이다. 다루고 싶은게 많아질 수록 초점이 흐려지고 상대의 흥미와 관심을 되려 떨어뜨리는 경우를 다들 한번쯤은 경험해보지 않았는가?
당초 러닝타임이 3시간이었는데 2시간 20분으로 잔가지를 쳐낸 것도 도움이 된 것 같다. 만든 사람은 아까워 죽지만 보는 입장에서는 심플할 수록 베스트가 된다.
전혀 지루하지 않고 몰입을 끝까지 유지하게 만든 제작진의 노력을 꼭 칭찬하고 싶다.
4. 정우성의 연기
황정민의 연기는 이미 정평이 나 있다. 영화는 망해도 연기는 남는다는 최민식 레벨에 가까워졌음을 느낀다. 이번에도 천재적이란 표현이 아깝지 않다.
누구라 콕 짚긴 미안하지만 서울의 봄 배역 중에는 쟁쟁한 배우들 속에서 연기가 다소 어색했던 배우들도 일부 등장한다. 워낙 다루는 인물이 많다보니 어쩔 수는 없지만 아쉽다면 아쉽다.
관건은 사실 갓우성님이었다. 김감독의 페르소나라 불리울 만큼 케미가 기대되면서도 사실 아수라에서의 연기는 불편했었다. 이후 '증인', '더킹'에서 한층 세련된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 이번 영화에서도 역할을 너무 잘 소화했다. 카리스마 있는 모습으로 돌변하는 과정, 나라를 걱정하는 진심, 고매한 인품을 표현하는 연기 모두 압권이었다.
정우성이 연기한 실존인물 장태완 장군의 당시 실물은 아래와 같다. 대체로 실존인물과 똑닮게 분장을 한 것과 달리 장태완 장군 만큼은 워낙 멋있는 역할이고 극을 이끌어가는 제1의 인물이기 때문에 정우성을 황정민처럼 분장시키진 않았나 보다. 영화 '똥개'에서처럼 비주얼 힘껏 망가뜨려도 멋있는게 정우성인데, 정우성이 대머리 분장을 했다면 타격은 컸을거 같다. 탈모관리의 중요성을 갑자기 여기서 깨닫는다. 과거 드라마 '제5공화국' 에서의 장태완역은 헤어와 얼굴선의 날카로움이 비슷한 성우 김기현님이 과거 맡은 바 있다.


5. 참 군인
반란군의 중심에 황정민(전두환)이 있다면, 진압군의 중심엔 정우성(장태완)이 있다. 그 밖에 진압군 편엔 육참총장이자 계엄사령관역의 이성민(정승화), 특전사령관역 정만식(정병주), 헌병감역 김성균(김진기) 등 다수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왜 다른 현대사에 비해 12.12사건의 상세한 내막엔 관심이 없었던 걸까? 곰곰히 생각해보니 진압군 측에 한 자리씩 차지했던 인물들도 반란군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도찐개찐이라고 간주되어 온게 아닐까? 단지 세력 다툼에서 밀린 것? 왜냐하면, 군사정권이다 보니 당시 육군 장교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고, 육참총장을 비롯해 당시 고위 장성들도 어찌보면 말년 독재자 박정희한테 잘 보인, 권력욕에 불탄 인물들이 아니었겠나 싶었다. 출신 신분 간의 세력 다툼. 그리고 승자의 역사 시작. 이쯤으로 알았다.
어쩌면 이게 틀린게 아닐 수도 있다.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이고 감독 나름의 주관성과 극적 요소가 입혀진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하지만, 그 반란군 무리 속에서 "참 군인"이 있었다는 점을 우린 기억할 필요가 있다. 적어도 장태완 장군 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듯 하다. 투항할 수 있었음에도 마지막까지 목숨을 바쳐 본분을 다 했던 애국 열사들이 존재했음을 꼭 기억하겠다. 감사와 존경을 표한다.
제목이 '서울의 봄'이다.
서슬퍼런 군부의 집권이 걸음을 멈추면서 서울에는 봄이 잠시나마 찾아왔다. 하지만, 신군부는 쿠데타로 다시금 정권을 장악했고, 5.18 광주를 앞글자만 입 밖에 꺼내도 유언비어 퍼뜨린다며 잡아가는 시대를 또 살아야 했다.
근래에도 헬이니 말들은 많지만 그 시절에 비하면 완연한 봄이다. 하지만 계절은 언제 바뀔지 모른다. 지난 역사는 그렇게 흘러 왔다. 내전, 독재와 탄압, 외세침략과 수탈, 공황 등 평화로운 시간보다 평화롭지 못한 시간이 더 많았다.
그런 관점에서 다음 정권을 누가 쥐느냐, 지도자가 누가 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일 수 밖에 없다.
차악을 선택하면 했지, 국가의 주인된 자들 스스로가 최악을 선택하는 일만은 부디 없길 바라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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