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

쾌락과 고통

男女共存 2023. 3. 20. 17:39

신은 왜 생명에게 쾌락과 고통을 주었는가?
쾌락과 고통은 생명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어떠한 역할을 해왔고, 한편으론 부작용을 낳았는가?

쾌락. 대표적으로 성적 쾌락이 있다. 성욕을 해소하면서 얻는 쾌락이다. 기분 좋음. 환희. 만족감. 식욕 역시 마찬가지다. 맛있는 음식을 배불리 먹으면서 만족감을 느낀다. 철저히 '느낌'이다. 쾌락과 고통은 모두 느낌, 감정의 영역이다. 자체가 주인이 될 수는 없고, 목적보다는 그 목적에 이르기 위한 수단에 가깝다. 수면의 욕구, 배설의 욕구도 있다. 생식하고 먹고 자고 싸고 하는 가장 원초적인 것. 그 속에 쾌락이 있다.
만족의 반댓말은 욕구다. 만족(감)은 일종의 보상이다. 욕심이 많고 끝없는 자는 만족을 모른다. 소정의 보상을 내려 주는데도 만족을 못 한다. 성적 욕구가 쉴 틈을 안 주고 샘솟으면 그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고 섹스/자위 중독으로 빠져버리기도 한다. 너무 같은 걸 빈번하게 하면 지루하면서 차츰 변태적으로 간다. 누가 봐도 이건 필요 이상이다. 성욕은 필요하지만 그렇게까지 갈 건 아닌데 말이다. 식욕 역시 주체를 못할 지경까지 가면 생존과 번영에 불리해진다. 혹자는 성공하고자 하는 욕구가 불타오르다 못해 광란의 질주를 벌이다 일을 그르치는 경우도 있다. 욕구가 설령 왕성하게 샘솟더라도 통제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부분은 자기 통제가 따라야 한다.
매슬로의 5단계 욕구에서는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될 수록 점차 상위 단계로 올라간다. 소속감을 느끼거나 남으로부터 존중을 받거나 하는 사회적 욕구도 있다.  최상위 단계에는 자아실현의 욕구가 있다.
번영을 이루려면? 하위 단계에만 너무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하위 단계를 충족시키는 가운데 점차 상위 단계를 지향하는 존재가 성공과 번영에 유리하다.  

정리해보면 이렇다. 생명에게 생존과 번영이 궁극적인 목적이라면 쾌락(과 고통)은 그 목적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다. 욕구는 그 만족감으로 가기 직전에 펼쳐진 다양한 재료들이다.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쾌락(만족감)을 느끼는데, 그 쾌락은 일종의 보상(당근) 개념이다.(고통은 채찍.) 욕구가 왕성한 것이 번영에는 유리하지만, 그 욕구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과해지면 되려 불리해지므로 통제가 필요하다. 매슬로의 욕구 5단계에서 하위 단계에 매몰되기 보다는, 상위 지향(하위 단계를 적정 충족시키면서 점차 상위 욕구 충족을 지향)하는 존재가 번영에 유리하다.

만약, 신이 있다면 생명의 생존과 번영을 원했을 것이고, 이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쾌락과 고통을 주셨다는 점이 명확히 설명된다.
진화론의 관점에서 각기 생명체들은 생존과 번영을 위해 각자의 방식 안에서 최선을 찾는다. 자연 선택, 시행착오를 통한 적응 및 변화를 거쳐 각 개체들은 쾌락과 고통의 모양 또한 다듬어졌을 것이다.

# 즐기기 위해 사는 삶
언젠가 "당신은 살기 위해 먹는가? 먹기 위해 사는가?" 라는 질문을 받아본 적이 있다. 후자인 먹기 위해 산다는 건 쾌락, 즐거움 자체가 삶의 목적이라는 거다. "인생 뭐 있어? 인생은 한 번 뿐! 즐기다 가는 거지~"와 같은 맥락이다.
우리 인간 역시 생존과 번영을 위한 수단으로 즐거움(쾌락)이 있을 진데, 그 수단과 목적을 바꾼 셈이다. 인간이 본능 또는 집단적 사고 방식에 매몰되지 않고 자각을 통해 개인의 현재 삶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덜 자연스러운,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다.
하지만, 이 또한 생존과 번영을 위한 인간만의 진일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구상 가장 고등한 생명체인 인간이 어느 순간부터 삶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렇게 계속 살면 안 되겠다 싶어 일종의 균형을 맞추는 작업이 아닐까 싶다. 덜 자연스럽다는 점에서 진보적이고, 앞서간다는 의미에서 전향적이다.

# 마약
마약에 대한 언급을 빠뜨렸다. 마약은 극도의 쾌락을 대표한다. 마약은 신이 만든 것일까? 신은 관여하지 않았고, 단지 인간이 악마의 유혹에 이끌린 것인가? 술은 어떠한 원료가 자연 발효된 것을 두고 그 효능을 우연히 경험한 후 발전시켜온 것이다. 양귀비, 대마는 본래 신경안정제나 진통제, 소독제 등 의료적 목적으로 쓰였다. 문제는 바로 중독성이다. 필요 이상으로 빠져들면서 섹스/자위 중독처럼 독이 되어 버린다. 약이 될지 독이 될지는 인간 스스로가 통제하기에 달렸다.
이 부분을 정리하자면 신은 약으로 내려 주셨지만 인간이 악마의 유혹에 이끌려 독처럼 쓰는 것이다. 인간 스스로 절제가 필요하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정리하자면,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이다. 인류가 처음엔 무분별하게 버섯을 따먹다가 독버섯을 가려내기 시작한 것처럼 말이다. 마약은 독버섯과 달리 비교적 서서히 독이 되는 반면, 극도의 쾌락을 선사하기에 인간이 아직 무분별하게 취하는 중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마약을 통제하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담배 역시 1990년대까지는 집안 거실에서, 심지어 비행기 안에서도 피웠다. 점차 나아질 대상이다.      
쾌락은 악한 것이 아니다. 쾌락은 악마가 만든 것이 아니다. 쾌락을 꼭 나쁜 시각으로 봐서는 안 된다. 단지, 악마가 실제로 있다면 극도의 쾌락을 미끼로 번영에 치명타를 입히고자 유혹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독이 든 사과인 '쾌락주의(=끝은 중독과 파멸)'에는 결코 빠지지 않도록 앞으로도 노력해야 한다. 기도도 노력이다.

# 고통 속 쾌락
고통 속에서 얻는 쾌락에 대해 살펴보자. 사도마조히즘. 가학과 피학. 모두 고통 속에서 극도의 쾌락을 뽑아낸다. 이 것이 왜 가능할까? 고통은 쾌락과 정반대 개념 같지만 위치가 매우 비슷하다. 둘 다 '감각을 자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매운 맛도 마찬가지다. 고통을 쾌락으로 치환시킨다. 이러한 변태스러운? 것 말고 긍정적인 것도 있다. 개인 또는 집단이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고통을 인내해야 하는 시간이 온다. 하지만, 이는 곧 발전을 의미하므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그 고통을 피하기보단 오히려 감사하고 기쁘게 맞이한다. 슬픈 고통이 아닌, 환희의 고통임이 표정에 드러난다. 고행을 통해 삶을 새롭게 바라보는 수행자가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신이 고통과 쾌락의 연결을 굳이 설계하진 않았을 것 같다. 복잡성에 의해 생기는 현상일 뿐. 이 또한 다양성이요, 세상의 일부다. 다만, 사도마조히즘은 통제의 영역에 두어야 한다. 삶을 파괴적이고 피폐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선을 넘고 넘는 과정에서 행해지는 일이며, 어느 순간 헤어나오질 못한다. 말 그대로 독이 되어 버린다.    

# 고통 없는 죽음
고통 없이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죽을 것만 같은 극심한 고통은 곧 그 죽음과 가까워지고 있음을 알려주는 위급 신호이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곧 죽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안다. 며칠 내로, 아니면 수십 년 후 언젠가... 생명을 억지로 연장하면서 고통스럽게 삶을 마감하고 싶지 않다. 가족들에게 짐이 되는 것 또한 고통스럽기 짝이 없다. 극도로 악화된 상태임에도 타의에 의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계속 버티고 버티다 죽기는 싫다. 존엄하게 죽고 싶다. 죽음에 대한 결정권을 스스로 쥐는 것이다.
고통이란 위험 신호요 위험함을 자각하게 만드는 채찍이다. 그렇게 설계가 되어 있다. 그래서 체내 신경을 엄청나게 자극한다. 버티면 버틸 수록 신호의 강도는 계속해서 높아진다. "나의 신경아. 더 소리지르지 않아도 돼. 니 말 충분히 알아 들었어." 그리고는, 불필요한 고통의 시간 총량도 줄이면서, 죽는 순간도 최대한 고통이 없는 방법으로 가는 것이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죽음을 앞두고 마약성 진통제를 투여하면서까지 고통을 낮추고 산소호흡기에 의존하며 병상에 쓸쓸히 누워있는 삶을 상상해보자... 그 고통과 감내에는 아무런 값어치가 없다. 나의 희생이 누군가에게 빛이 되는 것도 아니다. '종교적 의무' '생명 윤리'라는 값어치, 또는 자식된 도리로써 차마 그런 결정을 내리지 못할 뿐일 진데... 보자. 독실한 카톨릭 신자인 장인어른도 당신의 아버님이 하늘에 가까워졌을 때 연명 치료를 거부하셨다. 존엄사는 앞으로 더욱 확대 논의되어야 할 대상이다.